독일 자동차의 자존심 BMW
BMW에 매료되다
할리우드 스타 제이슨 스타뎀(Jason Statham)이 출연한 영화 <트랜스포터(The Transporter)>에서 그는 물건을 운반해주는 역할을 한다. 극 중에서 그가 탔던 BMW E38 모델은 당시 우연히 TV를 보던 초등학생인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환상을 심어주었다.
* 영화 <트랜스포터(The Transporter>(2002) ⓒThe Transporter
경찰의 추격을 능숙하게 따돌리며 좁은 골목길, 계단, 심지어는 역방향 도로까지도 미끄러지듯 움직이던 말끔한 자태의 검은색 세단. 나는 그때 받은 강렬한 인상 덕택에 BMW라는 브랜드를 뼛속 깊이 사랑하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도 브랜드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는 이유는, 그들이 지금껏 내가 처음 이해한 정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트랜스포터는 BMW가 2001년부터 2002년까지 클리브 오웬을 주인공으로 만든 8편의 단편 웹 영화인 <더 하이어(The Hire)>를 모티브로 삼은 영화다. 가이 리치(Guy Ritchie)와 같은 당대 최고의 감독들과 배우들이 참여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BMW 역사상 가장 큰 마케팅 성과를 이루었다.[[1]]
[[1]] 관련 기사: BMW's The Hire Was Ahead of the Curve and Still has no Equal (Jalopnik, 2013.7.23)
온라인 마케팅이 배너광고 수준에 머물던 당시 환경을 생각하면, BMW라는 브랜드가 매우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시도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캠페인은 당초 약 200만 명 정도의 시청자를 기대했으나, 2013년까지 약 1억 명의 시청자를 불러 모았다.
경쟁사들도 BMW의 이러한 성공에 비슷한 플롯으로 단편영화를 제작하였으나 아직까지도 더 하이어만큼의 성적을 보여준 회사는 없다고 한다. 2016년에는 <더 하이어>의 후속작인 <이스케이프(The Escape)>를 공개했다.
스포츠 세단으로서의 포지셔닝
BMW의 시작은 세계 전쟁 당시 독일 공군에 항공기 엔진을 만들어 납품하던 회사였다. 전쟁이 끝난 후 항공기 엔진 사업이 금지되자, 사업의 방향을 전환해 모터사이클과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자동차 산업의 후발주자로서 사업을 준비하던 중, BMW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포함한 당시 자동차 제조사들이 고급 자동차 세그먼트에 집중하는 것을 확인했다. 경쟁사가 편안함과 넓은 실내를 강조하는 부분과 달리, 그들은 스포츠 세단으로서의 차별화를 모색하게 된다. 이때부터 BMW는 강한 역동성과 운전성 등을 브랜드의 핵심 역량으로 삼아 자동차를 생산해 왔다.
일반적으로 '독일 3사'로 불리는 메르세데스 벤츠, BMW, 그리고 아우디 그룹은 모두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럭셔리함과 편안함, 아우디는 진보와 혁신을 내세운다. 이들과 구분되는 BMW의 모토는 '궁극의 드라이빙 머신(Ultimate Driving Machine)', 그리고 '순수한 드라이빙의 즐거움(Sheer Driving Pleasure)'이다. 이러한 정체성은 제품 및 모든 브랜드 활동의 구심점이 된다.
BMW는 어린아이도 구분할 수 있다
명확한 디자인 아이덴티티
BMW는 어린아이도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뚜렷한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가졌기 때문이다.
1975년에 처음 출시된 '3시리즈'와 오늘 내가 가진 차(2016년형 330e)를 비교하면, 수십 년의 세월을 넘는 뚜렷한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에게 디자인은
정체성을 표현하는 과정이다
앞선 챕터에서 명품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질문들을 제시했었다.
- 사용 용도가 뚜렷하고 유용한가
- 아름다운 형태를 가지고 있는가
- 사용성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가
BMW는 이 세 가지 물음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내릴 수 있는 디자인을 보여준다. 기능이 형태를 결정하고, 이를 통해 아름다움을 구현해내는 기능주의를 이들의 디자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궁극의 드라이빙을 위한 역동성은 디자인에서 1순위로 고려되는 사항이다.
모든 BMW는 키드니(kidney, 콩팥) 그릴을 갖고 있다. 이러한 모양의 그릴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차체의 기체역학(aerodynamics) 성능을 향상하기 위해서이다. 차의 끝쪽에는 민첩하고 역동적인 디자인을 표현하는 호프마이스터 킨크(Hofmeister-Kink)[[2]]를 적용한다. 이는 BMW만의 퍼포먼스를 만들어내는 후륜구동 방식을 강조하고자 포함한 상징적인 디자인이다. 또한 모든 제품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비율이 적용된다.
[[2]] 뒷 유리의 끝 부분이 이루는 고유의 곡선. 이를 개발한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유래
BMW의 인테리어는 단순하다. 기능에 충실하고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미니멀한 매력이 있다. 디자인의 영속성을 통해 남겨진 헤리티지다.
영화 <본 슈프리머시(The Bourne Supremacy)>에서 주인공 제이슨 본은 나폴리 항구를 벗어나며 BMW E28(1985년식 5시리즈)*을 탔다. 낡고 오래된 차에서만 느낄 수 있는 BMW만의 클래식한 감성이 있다.
* 'BMW in movies'에서 영화에 나온 전설적인 BMW 자동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BMW 클래식 카를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동차 회사들 중에 이 정도의 영속성을 유지하는 회사는 포르셰와 미니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미니는 BMW 그룹이 소유하고 있는 브랜드다.
마트를 갈 때도 드라이빙은 즐거워야 한다
가장 독일다운 브랜드의 선택
우리는 독일이라는 국가 브랜드를 생각할 때 '우수함', '실용주의', '기능주의'와 같은 단어를 떠올린다. BMW는 그러한 독일의 브랜드를 대표하는 '제 값'하는 브랜드다. 소비자는 브랜드에 대한 충성심을 브랜드 파워, 높은 완성도, 그리고 상품성의 교집합에서 찾는다.
BMW에는 슈퍼카라고 부를 만한 모델이 없다. 경쟁사인 아우디도 R8이 있고, 벤츠에는 나타나기만 하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SLS AMG 같은 모델이 존재한다. 그들의 고성능 양산 라인업인 M시리즈의 전신인 'BMW Motor Sport GmbH'도 한 때는 수 차례 F1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F1과 같은 모터스포츠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운전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브랜드가 아이러니하게도 대표 슈퍼카 한 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혹자는 고성능 모터스포츠 기술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가장 독일다운 브랜드의 노선을 택했다고 본다.
BMW는 운전의 즐거움은
레이싱 현장이 아닌,
실생활에서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의 드라이빙에서 뛰어난 퍼포먼스와 실용성을 즐길 수 있는 '고성능 양산차'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1978년, 그렇게 탄생한 M시리즈는 이제 고성능 양산차의 표준이 되었다.(M시리즈는 당연하고 일반 모델 역시 동급 경쟁차종보다 엔진 퍼포먼스가 더 강력하다.) BMW가 M라인을 출시한 이후, 벤츠, 아우디, 렉서스 등 역시 뒤따라 고성능 양산차를 만들기 시작했다.[[3]]
[[3]] 관련 보고서: <BMW Investor Presentation> (BMW AG, 2016.5)
운전하는 즐거움 그 자체
운전은 지루한 고통이다? BMW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마트에 가든 로드트립을 가든 운전은 그 자체로 스포츠와 레저활동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카레이서들과 같은 모터스포츠 종사자들만이 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기어를 바꾸고 페달을 밟을 때 입가에 맴도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것을 말해준다. 목적지가 어디든지 말이다.
'운전하는 즐거움 그 자체(Sheer Driving Pleasure)'는 상품 전략뿐 아니라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도 드러난다. BMW는 자동차 회사 최초로 1977년에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드라이빙 스쿨을 운영하기 시작한 브랜드기도 하다. 그리고 줄곧 해당 분야에서 선구자 역할을 해왔다. 그들은 아시아 최초의 드라이빙 센터를 한국에 지었다.
드라이빙 센터는 브랜드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다른 브랜드와의 차별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인터랙션 채널이다. 일반 딜러샵에서 제공하는 시승만으로는 운전의 즐거움을 몸소 느낄 수 없다. 차를 팔고자 하는 직원이 옆에 앉아있는데 마음 편히 페달을 밟고 핸들을 힘껏 꺾을 대담한 소비자가 몇이나 될까.
BMW 드라이빙 센터는 여태껏 일반 도로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코스를 제공한다. 이런 시설은 사실 브랜드의 입장에서는 돈이 많이 든다. 한 예로 미국 그린빌 스파르탄버그(Greenville-Spartanburg)에 위치한 드라이빙 센터는 건설에 약 1,250만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이곳에만 연간 15,000명이 넘는 고객들이 방문하는데, 교육은 나스카(Nascar, The National Association for Stock Car Auto Racing) 출신 프로페셔널 드라이버들이 담당한다. 기본적인 트레이닝부터 M-School이라 부르는 BMW만의 고성능 주행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서비스가 있다. 이를 위해 센터 안에서만 약 120대의 차량이 상주하고 있다.
BMW와 강한 연대감을 쌓는
인터렉션 채널
나도 지난 11월 시카고 알링턴(Arlington) 드라이빙 센터에서 열린 신형 540i 시승회와 일일 드라이버 스쿨에 참석했다. 이곳의 코치들 역시 10년 이상의 경력을 보유한 프로페셔널 드라이버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운전하고, 대화하며 고객들은 브랜드와 강한 연대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직접 가보니 BMW 차량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상당수는 브랜드의 차를 소유하지 않은 '잠재 고객'이었다. 고객들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BMW만이 제공하는 운전의 즐거움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할 말이 있겠는가. BMW는 브랜드 철학을 고객이 느낄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그들을 초대한다.
BMW의 미래
BMW에게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다
자동차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편리하고 유연한 이동수단으로서 인류에게 전례 없는 자유를 선물했다. 이동의 자유는 우리가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 더 깊은 것들을 보고 경험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러한 자동차의 원초적인 가치가, 사람들에게 자동차만큼은 좋은 것을 타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주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BMW는 자동차에 미친
사람이 타고,
벤츠는 럭셔리를
경험하기 위해 탄다
이 말은 BMW가 내거는 역동성이 시장에서 얼마나 강력한 차별성인지를 나타낸다. 좋은 차를 정의하는 항목은 다양하지만, BMW는 운전의 용이함(drivability)과 성능(performance)을 모든 항목 위에 둔다.
그들은 자동차의 본질을 단순히 이동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즐거움을 주는 레저 도구'로 본다. 1970년대 미국 시장에 처음 진출하면서부터 오늘까지 60년 가까이 사용되고 있는 표어인 'Ultimate Driving Machine'이 그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목표는 가장 개인적인 자동차를 만드는 것입니다. BMW와 운전자 사이의 감성적 연대는 늘 존재할 것입니다.
- 카림 하비브, 전 BMW 수석 디자이너
전 세계 모든 자동차 회사가 고민하고 있듯이 자동차 업의 본질은 바뀌어가고 있다. 단순 이동수단에서 이제는 생활 플랫폼이라 부를 만큼 그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Vision Next 100
BMW는 2016년 3월, 창립 100주년을 맞아 브랜드의 비전이 담긴 'Vision Next 100' 컨셉을 발표했다.[[4]] 지난 100년의 헤리티지를 향후 100년으로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하는 고민을 담아낸 것이다.
[[4]] 관련 기사: 100주년 맞은 BMW, 미래 자동차 'BMW 비전 넥스트 100' 공개 (경향비즈, 2016.3.8)
하랄드 크루거(Harald Kruger)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이동수단은 사람들 일상의 모든 영역을 연결시켜 줄 것이고, 미래의 기술들은 각자의 삶에 최적화된 맞춤형 이동수단으로 발전될 것이다. BMW는 프리미엄 이동수단으로써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것이다.
자율주행 자동차에도
직접 운전의 즐거움을
이 컨셉은 100% 자율 주행하는 차량을 모토로 다양한 신소재와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심에 놓은 것은 운전하는 즐거움을 구현하는 궁극의 드라이빙 머신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이다. 해당 컨셉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술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디지털 컴패니언(Digital Companion)이라는 BMW의 차세대 디지털 플랫폼이다. 이를 통해 운전자가 직관적으로 온전히 드라이빙에 집중할 수 있게 지원한다. 자율주행은 물론, 앞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사고 등을 예방하는 차원에서의 기술(Preventive Driving)을 적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얼라이브 지오메트리(Alive Geometry)다. 이는 대시보드에 작은 삼각형 조각들을 얹어 사고 가능성을 직관적으로 운전자가 느낄 수 있게 하는 기능이다. 인간-인공지능 상호작용(human-computer interaction, HCI)을 적용한 사례다.
세 번째는 100% 자율주행이 가능한 차라도, 운전자가 직접 드라이빙을 하고 싶을 때는 100% 핸들 조작이 가능하도록 하는 Boost모드를 탑재한 것이다. 자율 주행 시대에도 핵심가치인 운전의 기쁨을 전달하겠다는 점이 역시 눈에 띈다.
BMW 홈페이지의 기사를 통해 브랜드가 그리는 자율주행의 미래를 살펴볼 수 있다.
참고 자료
- 윤성빈, <독일차 왜 강한가>, 이노리서치글로벌 (2017)
- BMW Group, <2016 Investor Presentation> (2016)
- BMW Group, 40 years of Sheer Driving Pleasure – Anniversary celebrations for the BMW and MINI Driving Experience (2017)
- Klara Robert, Luxury Auto Brands Are Trying to Hook Potential Customers With Driver 'Experiences' (ADWEEK, 2016.8.6)
<명품의 조건>은 2018년 2월 퍼블리와 함께 발행한 디지털 리포트로 퍼블리가 뉴닉에 인수됨에 따라 콘텐츠를 제가 다시 가져와 craft + alchemy를 통해 다시 퍼블리시하게 되었습니다.
목차:
- 명품을 이루는 조건 혹은 본질
- 왜 프로들은 ThinkPad에 열광하는가?
- 독일 자동차의 자존심 BMW
- Gucci의 턴어라운드: 두 브랜드의 명암(1)
- Prada가 헤매는 이유: 두 브랜드의 명암(2)
- 공장으로 출발한 기업들, 스스로 명품이 되다.
- 영국의 헤리티지, Burberry
- 시계 산업이 실제로 파는 것
- 럭셔리 제국, LVMH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 명품 산업의 현재와 미래
- 좋은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