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프로들은 씽크패드(ThinkPad)에 열광하는가?
가장 위대한 씽크패드는 가장 최근에 출시된 씽크패드다.
컨설턴트의 상징
미국 시카고 오헤어 공항이나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있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검은색 도시락 같이 생긴 컴퓨터를 꺼내어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들.
이들 중 상당 수는 컨설턴트[[1]]인데, 그들이 노려보는 컴퓨터의 정체가 바로 레노버(Lenovo)의 씽크패드(ThinkPad) 노트북이다. 씽크패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컨설턴트의 상징이 됐다.
[[1]]: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들은 기본적으로 월요일 새벽 비행기를 타고 고객사로 가, 목요일까지 근무하고 홈 오피스로 돌아온다. 항공산업은 컨설팅 회사가 먹여 살린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공항과 비행기 안은 컨설턴트에게 제2의 사무실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성공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마칠 수 있다는 믿음
회의실의 유일한 연결 포트가 VGA뿐 이더라도, 물을 마시다가 실수로 키보드에 물을 쏟더라도, 씽크패드만 있다면 프레젠테이션을 마칠 수 있다. 고객사의 임원급을 상대로 서비스하는 경영 컨설턴트에게, 프레젠테이션에서 보이는 전문성은 신뢰도와 직결된다.
더불어 장시간 근무가 필수인 환경을 고려할 때, 컨설팅 회사에서 시장에서 가장 성능 좋은 노트북을 워크스테이션(workstation)으로 지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 (중국 기업인 레노버가 IBM으로부터 씽크패드를 인수한 뒤로는 많은 미국 컨설팅 회사들이 델이나 HP로 갈아타고 있기는 하다. 이들은 정부 컨설팅도 하기에 중국 제조사의 제품을 쓰는 건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IBM은 여전히 컨설턴트들에게 씽크패드를 지급한다.)
'비즈니스를 위한, 비즈니스에 의한, 비즈니스 랩탑'이라는 브랜드 DNA는 단 한 번도 변함이 없었다. 씽크패드는 2016년 TIME의 '가장 영향력 있는 50개의 도구들'에 선정됐고,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영구 컬렉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이로서 비즈니스 아이콘의 위치는 더욱 공고해졌다.
노트북으로 빵도 써는 시대[[2]]에 여기 검고, 각 졌으며, 벽돌 같이 생긴 노트북이 있다. 매일같이 모든 것이 변화하고 바뀌어 가는 요즘, 25년째 한 가지 디자인만으로 1억 개[[3]]가 넘는 노트북을 만들어온 컴퓨터 회사. 양장점이나 구두 집에서나 들을 법한 얘기를 컴퓨터 회사로부터 듣다니, 놀랍지 않은가?
[[2]]: 애플의 맥북 에어가 처음 나왔을 때 네티즌들은 해당 제품으로 빵이나 과일 등을 써는 동영상을 올렸다.
[[3]]: 출처: 레노버 홈페이지, 1992년부터 2016년의 씽크패드 판매량
씽크패드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살펴 보자.
생각하는 사람들의 도구
씽크패드 이야기를 하며 IBM[[4]]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씽크패드의 뿌리는 IBM의 모토인 'THINK'에서 시작됐다. IBM의 초대 회장이었던 토마스 왓슨(Thomas J. Watson, Sr.)은 회사의 전신인 CTR(Computer Tabulating Recording)의 사장으로 부임하며, 주어진 일만 하고 쳇바퀴처럼 반복 노동하는 직원들의 모습에서 생각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4]]: 씽크패드를 포함한 퍼스널 컴퓨터 사업도 소유하고 있었지만, 2005년에 레노보에 매각했다. 현재는 인공지능, 클라우드, 블록체인 등의 IT기술과 경영 컨설팅을 제공한다.
모든 비즈니스에 필요한 것은, 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 토마스 왓슨, IBM 창립자
THINK는 1911년에 왓슨 회장이 임원들에게 '생각 좀 하고 살라'며 꾸짖은 다음부터 오늘날 까지, 100년이 넘도록 IBM의 핵심 모토이다. 그는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정보를 지식화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고, 혁신을 낳는 비결이라 강조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일들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도구이자 생각하는 사람들의 동반자(companion). 씽크패드는 창업주의 이러한 정신을 그대로 투영한 브랜드다.
몰스킨(Moleskine)이 기록을 즐긴 위대한 사상가들과 예술가들의 기록 도구였다면, 씽크패드는 혁신가들의 작업 도구였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30년 간 일한 크레이그 굿(Craig Good)의 말에 따르면, 이 시대 최고의 혁신가였던 스티브 잡스 역시 자신의 회사인 애플이 노트북(Powerbook)을 출시하기 전 까지는 씽크패드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씽크패드가 비즈니스 세계와 IT 세계에 가져온 가장 큰 혁신은 이동성(mobility)이었다. 1994년에는 CD-ROM을 세계 최초로 노트북에 장착했고, 1999년에는 탈착식 도킹스테이션을 고안했다. 자사의 영업직들이 바쁘게 외근을 나가거나 돌아올 때 마우스와 주변기기를 일일이 떼는 수고를 덜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또 2000년에는 무선 통신을 세계 최초로 적용함으로써, 지식과 정보를 어디나 운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씽크패드는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환경에 놓인 사람들도 업무에 연속적으로 집중할 수 있게 도왔다.
혁신가를 위한 대체할 수 없는 도구, 그들은 씽크패드를 통해 정보통신 시대의 새 창을 열었다. 1990년대 이후 시장에는 수많은 노트북 제품들이 쏟아졌지만, 씽크패드만큼 강한 브랜드 정체성과 뚜렷한 목적성을 가진 노트북은 없었다.
레노버 체제 아래의 씽크패드
2005년, IBM은 소프트웨어 및 컨설팅 회사로서의 체제 변환 전략에 따라 씽크패드 사업을 중국의 PC기업 레노버(Lenovo)에게 매각했다. IT전문 조사기관 IDC의 기사 따르면, 레노버는 2005년 6.9% 정도에 불과하던 세계 PC 시장 점유율을 인수 후 2012년 14.8%까지 끌어올렸다. 2012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도 레노버는 세계 PC 시장 2위를 차지하고 있다.
2018년부터는 IBM이 씽크패드 브랜드를 소유한 기간보다 레노버 체제 아래에서의 기간이 더 길어진다. 노트북이라는 개념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씽크패드는 혁신적인 기술로 시장을 선도했고 팬들은 이런 개척자 정신에 열광했다. 아직도 수많은 매니아들은 IBM 시절의 브랜드를 그리워하고 있다.
레노버에게 남겨진 숙제는, IBM과 씽크패드가 개척해온 정체성을 탐구하고 이어나가는 것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최근 출시된 25주년 기념 노트북은 이러한 팬들의 기대에 화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씽크패드의 사용자이자 팬으로서, 나 또한 레노버의 이러한 행보가 반가웠다.
디자인의 영속성
수십 년 간 디자인의 영속성(consistency)을 지켜오는 브랜드는 업계를 막론하고 많지 않다. 하물며 늘 새로운 혁신을 선보이는 것이 미덕인 IT업계에서는 옛것을 고수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요소일 수 있다. 아이덴티티 유지에 공을 들이는 애플조차 수요의 변화에 따라 디자인 DNA를 바꾸어왔다.
아무도 2017년에 애플이 출시한 뉴 맥북(New MacBook)을 보고 1992년 출시한 파워북(PowerBook)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씽크패드는 다르다.
2017년 출시된 모델을 보고도
1992년에 처음 나온
ThinkPad 700C를 떠올릴 수 있다
씽크패드의 첫 디자인은 일본의 벤토 박스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 네모 반듯한 겉모습뿐 아니라 다양한 반찬을 담은 여러 개의 작은 칸을 본떠 부품을 배치해, 좀 더 효율적인 설계가 가능했다. 이때 이룬 절제된 외형과 균형 잡힌 설계는 '목적 있는 진화(purposeful evolution)'라는 명확한 지향점 아래 25년간 유지되어 왔다.
씽크패드의 수석 디자이너(Chief Design Officer)였다가 지금은 디자인 고문 역을 담당하는 데이비드 힐(David Hill)은 레노버 블로그의 기고를 통해 디자인의 영속성이야말로 씽크패드를 만드는 사람들의 핵심 가치라고 말했다. 그는 포르셰와 미니 쿠퍼와 같이 디자인의 역사를 유지하는 브랜드들 역시 ‘목적 있는 진화’를 이루었다 평가한다.
역사와 헤리티지에 입각한 디자인은 소비자와 브랜드 사이의 감정적인 연대를 만든다. 이것은 브랜드가 디자인 영속성을 뚝심 있게 유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원동력이 되어준다.
목적 있는 진화를 말하다
앞서 말한 '목적 있는 진화'의 근간이 되어준 씽크패드의 디자인 철학은 기능주의[[5]]다. 기능주의는 '효율의 완성이 시각적 완성을 이끈다'라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 목적에 적합한 효율적인 형태를 선택한다면, 시각적 미는 스스로 갖추어진다는 것이다. 예쁜 디자인(시각적 완성도)을 위해 효율성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타협하고 가는 시각 중심의 사고와 사뭇 다르다.
[[5]]: 기능을 건축이나 디자인의 핵심 또는 지배적 요소로 하는 사고방식. 현대 건축의 아버지 오토 바그너(Otto Wagner)의 "예술은 필요에 따라서만 지배된다", 미국 건축의 개척자인 루이스 설리반(Louis H. Sullivan)의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주장 등이 여기에 입각한다.
어쩌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완성한다는 생각은 교만일 수 있다. 미의 기준은 제각각 이기에, 누군가에게는 별 감흥을 주지 않는 디자인이 누군가에게는 스탕달 신드롬[[6]]을 불러일으킬 만큼 위대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내게 씽크패드의 디자인이 그렇다. 그들의 디자인은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도구','비즈니스의 완벽성'이라는 목적을 눈부시게 구현해 냈기 때문이다.
[[6]]: 아름다운 그림 같은 뛰어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의식 혼란, 어지러움증, 심하면 환각을 경험하는 현상
노트북이 아니다, ThinkPad다
씽크패드를 노트북이 아닌 하나의 대명사로 만든 기능주의들은 무엇인지 정리해 본다.
1.혁신의 아이콘, 트랙포인트
레이저 기술이 없어 마우스 바닥의 볼로 사용자의 움직임을 반영하던 1990년대, ThinkPad 700C에 최초로 달려 나온 빨간 점, 트랙포인트(TrackPoint)는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검지를 이용해 원하는 방향으로 압력을 조금 가하면, 화면의 커서는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의 움직임을 그대로 반영했다.
이제는 모든 노트북에 트랙패드가 달려있어 트랙포인트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전부터 씽크패드를 써오던 사람들은 오히려 트랙패드 기능을 끄고 이 기능을 사용하기도 한다. 컨설턴트라는 직업 상 파워포인트 작업을 많이 해야 하는데, 텍스트 입력 후 옮겨 도형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해야 한다. 씽크패드로 작업할 때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 마우스로 옮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훨씬 작업효율이 높아진다. 편의성의 승리이다.
트랙포인트 기능은 1992년에 최초로 세상에 출시되었지만, 2017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유저들은 이 작은 점을 통해 혁신과 연결된다도구로서의 실용적인 측면이 이전 대비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트랙포인트의 빨간 점은 브랜드의 혁신성을 함축적으로 담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시계의 기능적 요구도가 낮아진 지금에도, 마니아들이 다이빙, 항공시계 등이 가진 고도의 기술력에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얼마나 위대한 디자인의 영속성이자 유산인가?
2. 데스크탑의 사용 환경을 노트북으로
노트북의 본질은 이동성에 있다. 이동성은 단순히 휴대하기 좋게 만든다는 개념을 넘어, '데스크톱이 주는 사용자 경험을 이동 중에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조사들은 기능적인 본질을 가벼움, 두께 등과 맞바꿨다. 데스크톱이 주는 경험을 살리는 것보다는, 노트북을 아예 다른 성격의 워크스테이션으로 분리하기 시작했다.
반면 씽크패드는 PC의 본질적 사용 경험을 노트북에 재현하는 것을 바탕에 두고 발전해 왔다. 기능키나 특수문자 키의 크기와 위치를 데스크톱 키보드와 유사하게 배치한 7열 키보드는, 그 자체로 씽크패드를 선택하게 되는 이유였다. 2012년부터는 6열 키보드를 탑재하는 것으로 전략이 수정되며 많은 마니아 층의 아쉬움을 낳았다. 레노버 인수 후 노트북이 데스크톱과 아예 분리된 성격이 된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인 것이다.
3. 접촉을 통한 상호작용
6열 키보드로 바뀐 것은 팬층에 실망을 안겨줬지만, 씽크패드 특유의 키감은 잃지 않았다는 평이 많다. 이 부분에서는 매니아적 의견을 밝힐 수밖에 없겠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쫀득한 키감. 씽크패드의 키감은 가히 최고다. 키보드를 장시간 쳐야 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거의 하루 종일 키보드를 치는 나로서는, 노트북 구매 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구매 결정 요소이다.
씽크패드의 키보드는 손가락이 닿는 곳이 오목한 모양으로 살짝 패어 있다. 이런 키 모양은 손가락의 압력과 키가 맞닿을 때의 불편함을 최소화해준다. 시각적 완성도, 기술적 우수성뿐 아니라 '촉감'이라는 요소를 IT기기 디자인에 반영한 것은 당시로는 획기적이었다. 데이비드 힐은 이러한 편의성이 우월한 '인간 상호작용(superior human interaction)'이며, 씽크패드만이 갖고 있는 특징라고 표현했다.
4.밀리터리 스펙의 내구성
씽크패드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내구성'과 '품질'이다. 이를 위해 고무 처리된 페인트 마감과 탄소섬유, 카본 소재 등을 활용한다. 화재와 홍수 등 각종 재난에서도 씽크패드만큼은 멀쩡했다는 증언이 전설처럼 남아있는데, 'Legends of ThinkPad'라는 광고 시리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즈니스 상황에서 가장 실질적으로 유용한 것은 누수방지 기능일 것이다. 노트북에 물을 쏟으면 금세 마더보드 안으로 스며들어 시스템을 망가뜨리게 된다. 씽크패드는 안에 물을 받는 밸브를 두어 시스템 누수를 방지할 수 있게 했고, 이러한 방식은 다른 노트북들도 따라 하게 되었다.
누구의 워너비가 될 것인가?
이 리포트에 씽크패드를 명품의 하나로 다룬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명품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앞서 만듦새, 가치, 희소성 세 가지로 꼽았는데, 아마도 희소성에 대해 설명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씽크패드의 고사양 모델은 일반 노트북보다 조금 비싼 편이기는 하나, 레노버 인수 후 사양의 폭이 다양해지며 접근은 오히려 쉬워진 편이다.
나는 가격적 측면보다는 '씽크패드는 누가 열망하는 브랜드인가?'의 측면에서 희소성을 설명하고 싶다. 가격적 측면에서는 충분히 접근 가능한 제품이라도, 그것을 소비하는 층에 대한 인식이 때로 브랜드의 희소가치를 결정짓는 요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카페들은 실버 맥북을 쳐다보고 있는 창업가 지망생으로 늘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동료들과 함께 온갖 스티커가 붙어있는 맥북으로 코딩을 하고 와이어프레임(wireframe, 웹사이트 등의 구조와 기능을 설계하는 작업)을 짜며 희열을 느낀다. 이들을 지켜보면, 맥북을 통해 창의성을 구현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씽크패드는 보드룸 워너비
(boardroom wannabe)의
도구이다
기업 세상(corporate world)에서의 씽크패드는 실리콘밸리에서의 맥북과 같은 개념으로 통한다. 정장을 차려입고 엄숙한 분위기의 대기업 회의실(Board Room)에서 경영진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무대. 그곳에서 씽크패드를 통해 자신이 설계한 가치평가 모델과 다음 사업계획을 프레젠테이션 하며 그들은 엄청난 희열을 느낀다.
보드룸은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희소가치를 가진 도달점이고, 씽크패드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상징적인 도구가 된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비즈니스를 위한 도구'. 브랜드가 설정한 뚜렷한 목적은 매력적인 유저 상(image)을 만든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스타벅스에서 구형 노트북을 꺼내 일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최신형 기기로 뭔가 창의적인 것에 열중하고 있는 것만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당당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단종된 X220 같은 구세대 씽크패드를 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존경심과 더불어 무슨 일을 하는지, 씽크패드와 함께한 세월에 대한 호기심으로 말을 걸지도 모른다.
씽크패드는 '유행과 클리셰의 적이고, 카피의 적'임을 자처하는 브랜드다. 유행을 따르면 브랜드는 진부해진다. 유행에 따랐던 다른 브랜드들의 구형 노트북들은 유저를 시대에 뒤처진 사람으로 만들 뿐이다. 그러나 제품 안에 독창성(originality)과 진정성(authenticity)을 담는다면 어떤가? 오래된 구형 모델이 오히려 그것을 쓰는 사람을 ‘자신만의 뚜렷한 철학을 지켜가는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가장 위대한 씽크패드는 가장 최근에 출시된 씽크패드다.
- 아리마사 나이토, 씽크패드 개발자
씽크패드의 아버지이자 현 레노버 부사장인 아리마사 나이토(Arimasa Naitoh)의 말은 브랜드의 방향성을 한마디로 설명한다. 이는 "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라는 에르메스의 유명한 카피와 맥락을 함께한다. 단순히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를 넘어, 디자인의 영속성을 지켜가며, 그 위에 끊임없는 진화를 공존시킨다는 의미다.
이것은 명품에 대한 자신만의 감식안을 가진 사람들(connoisseur)에게 큰 가치이다. 계속해서 정신없는 변화만 거듭하는 것 같은 컴퓨터 산업에도 롤렉스나 포르쉐와 같은 브랜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 데얀 수직,<바이 디자인>,홍시 (2014)
- Hill David,<ThinkPad Design Spirit & Essence>, Lenovo (2012)
- Sun, Xie, Tian, and Wang, , University of Oxford and Tsinghua University (2012)
<명품의 조건>은 2018년 2월 퍼블리와 함께 발행한 디지털 리포트로 퍼블리가 뉴닉에 인수됨에 따라 콘텐츠를 제가 다시 가져와 craft + alchemy를 통해 다시 퍼블리시하게 되었습니다.
목차:
- 명품을 이루는 조건 혹은 본질
- 왜 프로들은 ThinkPad에 열광하는가?
- 독일 자동차의 자존심 BMW
- Gucci의 턴어라운드: 두 브랜드의 명암(1)
- Prada가 헤매는 이유: 두 브랜드의 명암(2)
- 공장으로 출발한 기업들, 스스로 명품이 되다.
- 영국의 헤리티지, Burberry
- 시계 산업이 실제로 파는 것
- 럭셔리 제국, LVMH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 명품 산업의 현재와 미래
- 좋은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